짤막한 글

[투준] Take it slow

더블제이'-' 2018. 5. 15. 00:21


*잔잔한 글을 쓰고 싶어서 이렇게 뜬금포로 글을 올립니다.🙈 전혀 말도 되지 않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새벽 되세요. 
 
 



*


“선배. 좋아해요.”
 
 
 
 
 희미한 기억 너머로 교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고백의 말 따위를 전달하기 위해 벌어진 입은 금붕어 마냥 뻐끔거리고, 부끄러움에 갈 곳을 잃은 내 손가락들은 그저 발갛게 변해 자기들끼리 부딪혔다. 온 힘을 다해 전달한 나의 고백은 단 몇 분도 되지 않아 거절당했고, 단 며칠도 지나지 않아 학교에 소문이 났다.
 
 
 

 다정한 말과 나를 바라보는 눈빛, 따스한 손길에서 느껴지는 그 모든 것이 나와 같은 마음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소문의 중심에 서게 된 선배는 나를 마주칠 때마다 ‘더러운 새끼. 조금 잘해줬다고. 조금 더 잘해줬으면 다리라도 벌렸겠다.’라는 등의 이야기를 건넸고,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보며 비웃으며 손가락질했다. 교실에 들어가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친구라고 해야 할까. 그저 동갑내기들은 예전과 같은 살가운 눈빛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
 
 
 

 비참했다. 사랑이라 생각한 감정들이 거짓이고, 짓밟히고, 더럽혀지고, 찢어졌다. 그렇게 나는 학교를 나와 발을 들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별문제 없이 내 학적 처리를 해주었고 그렇게 나의 학창시절은 고등학교 2학년에서 멈춰졌다. 지금 그 시절 기억 속의 나에게 갈 수 있다면 말없이 꼭 끌어안고 다독여주고 싶다.
 
 
 
 
‘괜찮아. 네가 잘못된 것이 아니야. 괜찮아. 준형아. 슬퍼하지 마.’
 
 
 
 
 그렇게 검정고시를 보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했다. 그리고 이듬해 수능을 보고 대학에 들어갔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살아가려고 한다.
 
 
 
 
 

*
 
 
 뒤를 돌아 건네지는 종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종이를 건네준 사람이 기다림에 지친 것인지 입을 열었다.
 
 
 
 
“이거. 과사에 제출해야 한다고 작성하라고 해서요. 작성하시고 뒤로 전달 좀 부탁드립니다.”
 
 
 
 
 아, 잠깐 멍하니 있다 타이밍을 놓쳤다. 종이를 받아들곤 미안하다는 뜻을 담아 고갯짓을 했다. 기재 사항을 작성하고 종이를 뒤로 넘기고 앞을 보았을 때도 그 사람은 여전히 내 쪽으로 몸을 틀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본 그 사람은 가볍게 웃어 보이며 ‘그냥요. 친해지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내 얼굴 가득 드리운 궁금증과 두려움을 읽은 거였겠지.
 
 
 
 
“몇 년생이에요? 엄청 어려 보이는데. 아, 저는 윤두준이고 올해 스물이에요.”
“아.... 동갑이고, 용준형이에요.”
“이야. 동갑이구나. 반가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어색한 인사 뒤에 티끌 하나 없이 해맑게 웃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웃는 게 참 예쁜 사람이구나. 쉽사리 손이 뻗어지진 않았지만, 호의를 넘길 수 없어 가볍게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은 뜨거웠고, 그 온도에 데인 듯 내 손끝도 뜨거워졌다.
 
 
 
 
 아무것도 모른 체 들어온 1학년 1학기에는 대부분 같은 강의를 듣는 듯하였다. 그로 인해 자연스레 두준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각자 자취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두준이는 같이 자취방 근처에서 술이라도 한잔 마시자고 이야기를 했지만, 매번 거절했다. 그래도 두준이는 끊임없이 나에게 권유를 했고, 나는 점점 더 거절이 어려워졌다.
 
 
 
 
 누군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무서웠다. 또다시 나도 모르게 마음을 주게 되어버릴까 봐. 그것이 또 잘못되었다고 손가락질당할까 봐. 두려웠다. 두준이는 그냥 여기까지 친구로만 지내야 한다. 더 이상 내 삶에서 잘못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그저 근처 가까운 편의점에 들려 이것저것 사고, 테이블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저 조용히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났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손길을 따라 고개를 드니, 두준이 서 있었다. 놀란 마음도 잠시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니 조금 반가운 마음이 들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오히려 놀란 사람은 두준이었나 보다. 담배를 물고 있는 내 모습을 사진이라도 찍듯이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준형아, 원래 담배 피웠어?”
“아, 미안. 싫어하면 끌게.”
“아니. 되게 색다르다. 내가 알던 용준형이 아닌 것 같아. 우와.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맥주 마시자. 내가 살게.”
 
 
 
 
 더 이상은 거절이 힘들어졌다. 내 마음 어디에선가도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마주 앉아 맥주를 마셨다. 그날 이후 두준이와 더욱 가까워졌다. 두준이는 남들이 모르는 내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이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한 것 같아 내심 좋다고 하였다. 두준아. 그렇지 않아. 네가 모르는 나의 모습은 나조차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점점 두준이를 만나면서 변해가는 나를 느꼈다. 흐릿한 기억 속에 손가락을 꼼질거리고 있던 용준형은 더욱더 흐릿하게 희미해져 갔다. 밝게 웃는 두준이를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고,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 과연 내가 이렇게 변해가도 되는 것인가. 나중에 같은 아픔을 느끼게 된다면 어떡해야 하는 거지. 그 누구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같은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된다면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소나기가 내렸던 어느 날은 우리 둘 모두 우산이 없어 가까운 자취방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세차게 내린 소나기에 둘 다 속수무책으로 젖어버렸다. 현관문 앞에서 머리를 털어내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준이는 수건을 들어 내 머리를 털어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나 부드러워 감히 쳐낼 생각조차 못 했다.
 
 
 
 
“좋아해. 준형아.”
 
 
 
 
 창문에 부딪혀 조각나는 빗소리에 맞춰 두준이 나에게 말을 했다. 놀라버린 내 심장에 그대로 움찔하자 두준은 웃으며 수건으로 내 머리를 덮어버렸다. 아마도 창피해서였겠지. 그 순간 희미해진 어린 용준형이 떠올랐다. 고백하던 어린 준형이의 마음은 지금의 두준이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 뒤로도 두준이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다. 간간이 나에게 ‘좋아한다.’라는 이야기를 건넸지만, 딱히 나의 대답을 원하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너는 나에게 아무런 것도 바라지 않는구나. 어렸을 때 그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제 곧 계절이 바뀌려고 하나 보다. 밤보다 낮이 더 길어졌고, 낮엔 활동하기에 조금 힘든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날은 유독 두준이가 힘들어했다. 이유를 물어보자 곧 비가 올 거라고 했다. 그러니 강의 끝나면 자취방으로 가서 술 한 잔을 하자고 했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하는구나. 싶은 마음에 웃으며 허락했다. 자취방을 가는 도중에는 나도 느낄 만큼 물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가 무거웠고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그저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잔 두 잔 술잔을 비워내는데 반대로 내 마음은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두준이에 대한 사랑이겠지. 내 마음에 대해 생각을 하다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내 마음에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어이가 없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너무 늦게 깨달은 것에 대한 죄책감일까. take it slow. 윤두준 앞에서는 소용없는 말이었다. 천천히 신중하게 물들어 가고 싶었는데. 이젠 나의 마음도 걷잡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빗소리 들으니까 처음 고백한 거 생각난다. 좋아해. 준형아.”
“... 나도 좋아해. 윤두준.”
 
 
 
 
 고백의 말이 끝나고 처음으로 듣는 내 목소리에 두준이는 두 눈이 토끼만 해졌다. 저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다. 처음 보는 모습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어 보였다. 그러자 두준은 표정을 굳히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의아하여 나 역시 두준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자 두준이 입을 열었다.
 
 
 
 
“정말 내가 좋아서 좋아한다고 한 거야?”
 
 
 
 
 이게 무슨 말일까. 이제 와 내 고백을 듣고 나니 후회가 되는 건가? 아니면 마음이 변한 건가? 그때 시절과 같은 상황인 건가. 나를 흔들어 놓고 그때처럼 내 사랑이 잘못됐다고 하려는 건가?
 
 
 
 
“그게 무슨 말이야. 두준아. 내가 고백받으니까 마음이 변했어?”
“아, 그런 뜻이 아니야. 준형아. 내가 계속 고백을 해서 네 마음속에 부담감으로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있잖아. 마지못해 허락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나를 좋아해서 이야기한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래.”
“두준아.”
“...”
“대답이 늦어서 미안해. 너는 수많은 사람들 중 나에게 소중한 단 한 명의 사람이야. 네가 내 마음속에 잡은 그 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너는 이다지도 나에게 친절하구나. 나의 생각을 존중하고 내 입장을 생각해주는구나. 두준아. 나는 너에게 사랑을 받는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 너와 함께 지냈던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는 너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어. 한순간이 아니라 천천히 나를 물들이고 있었어.
 
 
 
 
 고마워. 오랜 시간 물들게 해줘서. 고마워. 기다려줘서. 고마워. 내 마음을 다시 따뜻하게 만들어줘서. 이제 내가 받은 사랑을 너에게 줄 차례야. 앞으로 너와 함께하는 그 모든 시간 우리의 사랑만이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