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막한 글
[투준] 다녀왔습니다
더블제이'-'
2018. 10. 29. 21:21
“졸업하면 당분간 사라질 거야.”
처음엔 그저 장난처럼 내뱉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흔한 인사말도 없이 그저 ‘다녀올게.’라는 짤막한 카톡을 남기고는 로밍은커녕 분신처럼 들고 다녔던 핸드폰도 제 방에 고이 모셔두곤 훌쩍 떠나버렸다. 당혹감과 황당함 속에 그저 네가 무사하기만을 걱정했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그가 사라진 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별다른 일 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그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집 초인종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고, 초인종을 누른 장본인은 말도 없이 사라졌던 그. 용준형이 문 앞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또다시 밀고 들어오는 당혹스러움도 잠시 그저 반가운 마음에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러자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들어오는 네 모습에 그저 헛웃음만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양손 가득 들고 있는 그건 뭐냐? 아니 애초에 어딜 다녀왔는데? 핸드폰은 또 왜 안 가져갔고?”
“하나씩 물어봐. 하나씩. 당분간은 어디 안 갈 거니까.”
“혹시 또 아냐. 갑자기 휙 사라질지?”
“... 뭐. 그건 나도 장담 못 하겠지만. 우선은 다녀왔어. 두준아.”
‘다녀왔다.’라는 인사를 건네며 준형이는 양손 그득했던 쇼핑백을 내려놓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자신이 왔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리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의 행동에 나 역시 보답이라도 하듯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자 준형이는 안고 있던 팔을 풀어내고는 제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다시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인 것처럼 소파에 앉더니 옆자리를 팡팡 치며 얼른 오라 성화를 낸다. 어이가 없음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준형이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의 옆에 앉았다. 앉자마자 그는 쇼핑백을 나에게로 다 밀어준다.
“뭐야 이게?”
“선물.”
“선물?”
“응. 다른 사람들 선물은 하나도 없어. 오로지 우리 두준이 것만 사 왔지 내가.”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테이블 위 가장 위에 놓여있는 쇼핑백을 들어 안에 내용물을 꺼내자 웬 일본어가 가득한 상자에 바나나가 그려져 있다. 이게 뭐냐는 눈빛을 보내자 대수롭지 않게 ‘바나나 빵.’이란다. 그 모습에 상자를 열어보며 준형이에게 물었다.
“일본 다녀왔어?”
“응. 일본에서 유명한 거래. 바나나 빵이랑 저 밑에 있는 병아리 만주랑.”
소파에 앉아 건네준 핫초코를 홀짝이며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양다리를 번갈아 가며 흔들어 보이는 모습에 팔을 뻗어 가만히 준형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윽고 둘의 시선이 마주할 때 준형이에게 나지막이 물어보았다.
“그건 나도 눈이 있으니 그림 보면 대충 알아볼 수 있는 거고. 일본은 왜 갔는데.”
“음...”
“...”
말없이 그저 준형이의 대답을 기다리며 바라보자 그 역시 내 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준형이의 입술이 벌어졌다.
“... 그냥.”
준형이를 쏙 빼닮은 대답이었다. 아직은 어리기에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갈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준형이의 상의는커녕 ‘다녀올게.’라는 카톡을 남기고 훌쩍 떠나는 여행은 일본을 시작으로 이루어졌다.
어디를 갈 것인지, 언제 돌아올 것인지. 묻기도 전에 준형이는 홀연히 떠나버렸다. 정확하게는 나에게 ‘다녀올게’라는 카톡을 보내곤 그대로 핸드폰을 꺼버리고는 공항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 년. 365일 매일 떠나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아르바이트를 하다가도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바로 떠나는 그런 식이었다.
나에게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지는 기간 역시 들쑥날쑥하였다. 어느 때는 일주일 만에 돌아온 적도 있었고 어느 때는 한 달 동안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래도 돌아올 때는 나에게 준다며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럴 때마다 이런 것보다 그냥 네가 내 곁에서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떠나는 준형이에 대한 걱정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차츰 그 빈도수가 높아짐에 따라 내 마음은 걱정이라기보단 준형이를 보고 싶어 했고, 그리워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내가 느끼는 마음을 굳이 사전적 의미로 정의를 내려보라 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었다.
사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라 확신이 들었던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때에는 웬일로 다른 나라로 떠나지 않고, 한국에 머물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간간이 강의를 마치기 전에 준형이에게 연락이 오곤 했다. 특별한 연락은 아니었다. 그저 ‘저녁 먹자.’ 또는 ‘술 한잔할까?’ 등의 아주 단순히 친구들 사이에 오가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준형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대수롭지 않게 왜 그러냐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내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있다.
“통장에 돈은 있는데, 내가 갈 곳이 없어. 이러다 윤두준 옆에만 붙어있을 것 같아.”
그 시절 내 마음은 아직 준형이에 대한 사랑보다는 우정에 더 가까웠기에 그저 웃으며, ‘내 옆에 붙어서 뭐 하냐. 얼른 여행이나 가버려.’라고 대답했었다. 지금에서야 이렇게 대답한 것을 후회하지만.
내 대답이 촉매제가 되었을까. 준형이는 열흘 뒤 또다시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에 그저 몸 조심히 잘 다녀오라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준형이가 떠나가고 나는 내 나름대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는 중간고사 기간이라 정신없이 보냈었던 것 같다. 문득 달력을 바라보니 준형이 떠난 지 3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라는 생각에 미치자 온통 머릿속에 준형이로 가득해져 버렸다. 머리도 조금 쉴 겸 노트북으로 메일함에 접속하니 새로운 메일이 눈에 띈다. 발신자도 모르는 사람이어서 그냥 단순한 궁금증에 메일을 클릭하였다. 열린 메일에는 간단하게 메모처럼 남겨진 말이 눈에 띄었다.
- 두준이에게.
잘 지내고 있어? 여기 엄청 좋다.
바다를 보는데 문득 네 생각이 났어.
건강 조심하고 한국에서 봐.
그리고 첨부된 사진을 클릭하자 석양이 가득한 하늘과 한데 어우러진 바닷가 앞 커피숍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브이를 하고 있는 준형이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정말이지 나도 모르는 순간 손을 뻗어 모니터 안의 준형이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용준형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이.
준형이는 정확히 한 달하고도 열흘이 지나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말도 없이 도착해 그저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는 것으로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아, 옛날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는 학교와 가까운 곳에서 자취하고 있었고 지금 나는 용준형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문 앞에 서 있는 준형을 보자마자 내 마음을 가득 담아 끌어안았다. 준형이는 얌전히 안겨있다 이내 나지막이 ‘숨 막혀.’ 말하며 내 등을 살짝 쳤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내 품에서 준형을 떼어놓자 나를 보며 웃어 보인다. 사진 속 그 모습 그대로.
“이번엔 어디 다녀왔어? 뭔가 쇼핑백이 더 많은 기분인데?”
“유럽.”
“... 유럽이 한두 군데냐?”
“유럽은 처음이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유럽부터 다녀왔지.”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준형이가 사 온 선물을 뜯어보았고 준형이는 자신의 여행담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이 시간을 그리워하고 또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만큼 이 시간이 행복했고 소중했다.
유럽을 다녀왔으니 한동안은 한국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로 통장의 잔액이 0을 보였는지 준형이는 1년이 넘도록 한국에 있었다. 예전부터 일본은 말할 것도 없이 주말을 이용해서라도 다녀왔고, 중국이나 가까운 동남아도 옆에서 볼 때 ‘질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자주 다녔는데 이번에는 그저 한국에만 머물러 있었다. 하루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준형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지난번이랑 반대로 갈 곳은 많은데, 통장에 돈이 없어. 그래서 지금 윤두준 옆에만 붙어있어.”
준형이의 입술을 타고 넘어 나오는 그의 대답에 그저 ‘그래. 그냥 제발 좀 붙어있어라.’라고 대답하였지만, 준형이에게 전달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입을 꾹 다물고 속으로만 이야기했다.
*
시간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평화롭게 흘러갔다. 그사이 나는 졸업반이 되었고 준형이는 여행도 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렀다. 사실 나는 졸업반이 되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취업이라는 것에 대해 신경 쓸 일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 몹시 추웠던 어느 날 나는 졸업을 하였고, 준형이는 나에게 자신과 닮은 꽃다발을 선물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준형이는 그렇게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내가 원하는 곳에 취업을 되었을 때 준형이에게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제 일처럼 같이 기뻐해 주고 수고했다고 말하는 그 말 한마디에 그동안 힘들었던 기억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나의 합격 소식을 들은 준형이는 일주일 뒤 또다시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생각보다 회사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사회의 일원이 되어 소속감을 느끼고 지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지치고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그런 시간을 쪼개어 항상 준형이를 생각하고자 했다.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이하며 출근을 한 지도 엊그제 같은데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다소 뜨거움이 담겨있다. 고개를 들어 달력을 바라보니 벌써 6월이 되었다. 그리고 준형이 떠나간 지 3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떠나가있는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불현듯 내 머릿속을 자리 잡은 준형이의 생각은 쉽사리 떨쳐내지 못했고 나는 그날 퇴근을 하면서 근처 슈퍼에서 맥주를 사 왔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다 노트북으로 메일함에 접속하였다. 요즘 회사에선 업무용 메일을 쓰다 보니 개인 메일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 정리도 할 겸 접속하여보니 엄청나게 쌓인 수많은 스팸메일이 반겨준다.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 오래전 준형이가 보낸 메일이 눈에 띄었다. 옛 기억에 웃으며 클릭을 하자 준형이만큼이나 간결한 내용과 환하게 웃고 있는 준형이의 사진이 보인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준형이에게 답장을 썼다.
- 얼마나 즐겁고 좋길래 한국에 들어오지도 않아.
아픈 곳은 없지? 보고 싶다. 사랑해 용준형.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메일을 보내고 노트북을 닫았다. 후회는 없었다. 준형이 확인하고 나에게 욕을 할 지어도 이렇게라도 해야 나 역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겐 수신확인을 할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날 메일을 보낸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저 확인 여부를 차마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준형이에게 메일을 보낸 지도 열흘 가까이 흘렀다. 한가로운 주말. 소파에 누워 그저 ‘속절없이 시간만 가는구나.’ 등의 별 볼 일 없는 생각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깜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터폰을 확인하자 꿈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용준형이 서 있었다.
너무 놀라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을 때 준형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초인종을 눌렀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문을 열었다. 갑작스레 열린 문에 준형이 역시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야! 깜짝이야...”
내 눈앞에 보이는 인영은 환영도 아니고, 내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환청도 아니다. 진짜 용준형이었다.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어 그대로 준형이를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순순히 끌려온 준형이는 내 등을 토닥이며 미소 지었다. 그냥 보이지 않아도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 어깨를 잡고 품에서 살짝 떼어냈다. 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자 준형이는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뚫어지게 바라보는 내 시선을 피했다.
“... 왜 피해.”
“어... 그렇게 너무 뚫어지게 보니까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잖아.”
“... 할 말이 그거뿐이야?”
“어... 다녀... 왔습니다?”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다시 한번 그대로 끌어안았다. 그러자 내 품에 안긴 준형인 그저 웃으며 가만히 내 등을 쓸어내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미안 미안. 우리 두준이 열심히 일하라고 나도 열심히 돌아다니고 왔지.”
“이번에는 어땠어?”
“너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어딘데.”
“우선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안 돼? 나 다리 아픈데.”
편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마주 잡는다. 그런 준형이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바보처럼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준형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 입가에 살짝 입을 맞췄다.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춘 나를 바라보던 그는 손을 들어 제 머리를 갉작이더니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원래는 더 있다가 오려고 했는데 네 메일을 보자마자 가슴이 뛰었어.”
“...”
“그리고 너무 보고 싶었어. 그래서 하루라도 더 빨리 오려고 노력했어.”
“고마워. 준형아.”
그의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꽉 끌어안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준형이 나지막이 내 귓가에 속삭인다.
“다녀왔어. 두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