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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형아. 마트 좀 다녀오자.”
“왜요. 지난번에 다 산거 아니었어?”
“니 놈이 무겁다고 찡찡거려서 갈비고 뭐고 아무것도 못 샀잖아!”
“...”
“그러니까 진작 운전 좀 하라니까. 늙은 엄마 고생 시킬 거야?!”
아니... 어머니 그런다고 차 안 사주실거잖아요... 남들보다 일 년 늦게 대학을 가게 되어 21살에 면허 좀 따라고 등 떠미는 엄마와 똑같이 등 떠미는 사랑스러운 윤두준 덕분에 운전면허는 취득을 하였다. 그러나 도통 운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사고가 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복잡한 서울 시내에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윤두준이 대단해 보일 정도다. 그리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집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훨씬 많은 나는 더욱이 운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아, 윤두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벌써... 알고 지낸지 언 13년째고 내 옆에서 애인이 된 것은 12년째인 잘난 놈. 20살 초반 내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하기도 했지만, 잘 넘겨서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윤두준은 그냥 좀 사기캐릭터인 것 같다. 운동은 운동대로 잘하고, 공부는 공부대로 잘하는 그런 놈. 그리고 지금은 잘 나가는 사회인. 거기다 나 같은 애인도 있고. 다 가졌네. 이 새끼는.
엄마와 함께 마트에서 끙끙 거리며 짐을 나른 뒤, 기력이 빠져 침대에 누워있자 핸드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내가 사랑하는 윤두준.
-어. 두준아.
-준형아. 집이야? 퇴근 시간 맞춰서 나와.
-귀찮은데...
-맛있는 거 먹고 드라이브하자.
-야 맛있는 걸로 꼬시지 말고 운전하면 술 못 마시잖아?
-술보다 자기랑 같이 있는 게 좋지.
저런 이쁜 새끼. 말 한마디에 저렇게 껌벅 죽는 나도 콩깍지가 아직도 벗겨지지 않았나보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윤두준이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고 시간 맞춰 두준의 회사 앞으로 간다. 그러자 제 앞에 서 잘빠진 차 한 대가 창문을 내리고 클랙슨을 울린다. 내린 창문 틈으로 보이는 내 남자의 모습에 얼굴 가득 미소가 퍼진다. 그리곤 지정석과 다름없는 조수석의 문을 열고 앉았다. 그러자 창문을 올리며 손수 벨트까지 메어주며 제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웃어 보이는 내 남자.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막 도착.”
“회사에서 맛있는 한정식집 알려줘서 예약했어.”
한정식이라는 말에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작업을 하다 보면 밤낮이 바뀌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끼니를 잘 챙기지도 않는다. 이번에 맡은 작업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마 두준이는 거하게 먹이려고 하는 것 일 거다. 그 마음을 알기에 고분하게 따라간다. 한 손으론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론 내 손을 마주 잡은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자 옛 생각이 난다.
*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아주 무더운 어느 날, 미술을 하던 나는 방과 후 아무 의욕 없이 미술실에 처박혀서 그림이나 끄적이고 있었다. 더위를 무진장 타는 나에게 여름은 지옥과도 같았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연필을 잡고 화지에 선을 이어가는 동안 갑작스레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히익-”
“아,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라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 이 새끼야 내가 더 놀랬잖아. 인기척이라도 내고 들어오던가.”
“노크했습니다. 용준형씨. 니가 못 들어놓고 어디서 승질이야. 이거나 처마셔.”
손위에 사뿐히 안착하는 콜라를 보자 입안에 갈증이 확 돌았다. 얼른 캔을 따 한 모금을 마시며 시선을 돌리자 윤두준은 의자를 갖고 와 내 옆에 앉으며 그림을 바라본다.
“뭐 그리는 건데.”
“말하면 니가 아냐. 예술의 심오함을.”
“... 놀고 있다.”
“... 알아. 나도 모르겠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냥 손 가는대로 끄적인 거야.”
대답이 끝나자 두준이는 내 그림을 아주 복사라도 할 기세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살짝 민망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화지를 치우러 손을 뻗자 내 손목을 가볍게 잡는다.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살짝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무 저항도 없이 끌려가 두준의 코앞까지 다가가자 두준은 눈을 감고 그대로 입술을 맞대었다. 놀람도 잠시 내 안에 퍼지는 민트향을 느끼며 손을 들어 두준이의 목을 감싸고 조금 더 입술을 깊게 묻었다. 그것이 우리의 첫 키스였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는 두준이와 나는 같은 대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하지만 실기만으로도 벅찼던 나는 그대로 낙방을 하고 말았다.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인생 처음으로 실패라는 것을 경험했던 순간이었다. 그러자 어리석게도 그 모든 화살은 두준이에게 향해졌다.
‘니가 날 꼬셔서 그래. 너는 공부만 하면 되지만 나는 다르잖아! 왜 가만히 있었던 새끼 건드려서 대학도 못 가게 만드냐고!!!!!!’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러자 두준이는 내 손을 잡고 울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사실 두준이는 그 누구보다 내 옆에서 힘이 되어 주었다. 아마 내 그림의 절반 이상은 두준이가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두준이는 나에게 격려와 칭찬과 사랑을 주었다. 그런 두준이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때의 나는 두준이에게 상처만을 주었다. 수능 결과 발표 후, 집에서만 틀어박혀 모든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두준이의 모든 연락도. 졸업식도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두준이가 미웠는데 시간이 지나니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한심해서 두준이를 볼 자신이 없었다. 몇 번 집으로 찾아오기도 하였지만 만나지 않았다. 엄마도 항상 두준이에게 미안해하시며 ‘준형이가...’ 하시며 말끝을 흐리셨다. 그럴 때마다 두준이는 다음에 오겠다고 웃으며 돌아가곤 했다. 나의 얄팍한 질투심 때문에 우리 모두가 상처받은 시기였다.
그렇게 한동안 자괴감에 빠진 생활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대학에 도전하기로 했다. 재수를 결정하고 실기학원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한 6개월 쯤 하였을 땐가? 그날따라 유독 가져가는 짐이 많았었던 것 같다. 양손에 한 보따리 들고 학원 문을 나서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만치 앞에 웬 하얀 자동차에 기대어 있는 두준이가 있었다. 놀란 시선은 끈질기게 두준이를 향했고, 그 시선에 두준이는 대답하듯 천천히 다가왔다.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도망가지도 못했던 나는 내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다가온 두준이는 손을 뻗어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안아주었다. 모든 것을 던지 듯 내려놓고 두준이의 등을 끌어안으며 한없이 울었던 것 같다. 미안하다고.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나의 삐뚤어진 생각으로 잠시 7개월 정도 이별 아닌 이별을 경험하곤 두준이는 매일같이 학원에 차를 가지고 마중 나와 집까지 편하게 데려다주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졸업하자마자 면허학원에 등록했다고 한다. 내가 재수하는 것을 알고 집까지라도 편하게 데려다주고 싶었단다. 그 말에 다시 한번 관계의 깊이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고, 옆에서 그 모든 것을 나에게 주는 사랑하는 사람 덕분에 그 해 두준이와 같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마지막 실기 결과까지 완벽하게 합격한 기념으로 두준이와 겨울 바다로 향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두준이의 차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옛날 생각난다. 나 데려다준다고 차 가져온 거.”
“아, 그때 솔직히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그냥 너만 보려고 갔었던 건데.”
“그래서 고맙다고.”
“응. 나도 사랑해.”
“사랑한다고는 안 했는데?”
“응. 밤에 안 자고 싶다고?”
“두준아. 나도 운전할까?”
“야. 말 돌리지 말고. 갑자기 왜? 하고 싶어?”
“그냥 매번 자기만 하니까 미안하기도 하고.”
내 말에 기분이 좋은 건지 잡고 있는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춘다. 한참을 서로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장난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예약한 식당에 도착하였다. 두준이가 먼저 예약으로 미리 이야기를 한 건지 대체적으로 자극적이지 않고 약간은 심심하게 간이 된 음식들이 나왔다. 덕분에 맛있게 먹고 있는 도중 두준이의 궁금증이 가득 담긴 시선을 느꼈다. 시선을 마주하자 두준이가 물었다.
“자기. 진짜 운전은 왜?”
“응? 아아. 오늘 엄마랑 마트 가는데 뭐라고 좀 하셨어. 운전해서 엄마 좀 편하게 마트 가자. 학원을 다녀라. 하시면서.”
“학원은 왜 다녀. 베스트 드라이버가 여기 있는데.”
“엄마도 있지만, 진짜 너무 자기만 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한 이유도 있어.”
“괜찮아. 자기가 밤에- 악. 야. 아프잖아.”
“오냐오냐하니까 매를 벌지? 밥이나 먹어.”
그렇게 두준이와 티격태격하며 남은 음식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당분간은 외식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두준이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자 보답은 밤에 받겠다고 한다. 음... 오늘은 기분이니까 맥주나 사가지고 들어가서 둘이 오붓하게 마시면서 밤을 보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두준이가 갑자기 자동차 키를 앞으로 내민다.
“응? 이거 왜?”
“할 수 있겠어? 집까지 한번 해볼래?”
“오호. 그럼 당연하지 나만 믿어. 나 믿지?”
“그럼 우리 자기만 믿지.”
의기양양하게 자동차 키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며 안전벨트를 하고 옆을 바라보자 두준이도 안전벨트까지 다 메곤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잘해보라며 응원해준다. 그 모습에 더욱 용기를 얻은 나는 시동을 걸기 위해 키를 꼽았다. 그리고 페달 위에 발을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 그럼 가볼까? 브레이크가 오른쪽인가?”
“....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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