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준이를 처음 만났던 날은 유난히도 추웠던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마지못해 다니던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니 빈집이었던 옆집 현관문이 조금 열려있었고, 나는 궁금함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집에서는 고소한 부침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고, 주방에 계셨던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인사를 건네셨다. 식탁 위에 놓인 부침개는 딱 봐도 우리 가족이 먹기는 많아 보이는 양이었다. 그저 그 식탁 주위를 서성이다 이내 자리를 잡고 앉자 그제야 엄마도 나를 돌아보셨다. “엄마. 옆집-”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마는 옆집에 이사 왔다며, 아침부터 이삿짐을 옮기느라 조용했던 복도에 활기가 띠었다고 한다. 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옮기고 있다는 이야기에 엄마는 부리나케 부침개를 부치고 ..
“염병.” 손을 들어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음과 동시에 입술 사이로 욕이 절로 나온다. 분명 보통과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적어도 한 시간 전까지. - 평소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평범하게 출근을 하고 책상에 앉아 스케줄을 확인하자 약 한 시간 뒤에 잡혀있는 예약을 확인하고 원활한 상담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를 준비하였다. 나의 직업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모든 이들에게 축하받으며, 앞으로의 미래를 약속하는 그날에 두 사람 모두가 가장 근사해 보일 수 있도록 준비해주는 웨딩플래너. 이것이 나의 직업이다. 한가로운 대학 시절 플래너였던 사촌누나를 간간이 도와주다가 졸업을 하자 누나는 나에게 본인 결혼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맡기고, 결혼식 이후엔 본인의 회사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덕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
작은 의자에 앉아 앞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자 그 안에는 생기를 잃어버린 듯 약간은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비친다. 가만히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바라보다 손을 천천히 들어 앞에 놓인 물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곧장 그 물체를 입술에 그대로 발랐다. 그리고 다시 거울을 바라보자 생기를 찾은 듯한 입술에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조금은 자신감이 돌아온 것 같은 느낌에 안심이 되었다. 생기를 잃은 듯한 모습의 우울한 모습도 나였고, 지금 붉은 빛의 립스틱을 바르고 미소 짓고 있는 모습도 역시 용준형 나였다. * “여기서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차가웠던 공기는 어느 순간 따뜻한 바람을 품에 안고 불어와 모든 꽃들을 피우게 했다. 그리고 얼굴에 닿는 바람은 미세..
글쎄. 그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옛날이었을 거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으셨고, 그에 우리 가족은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가게 된 어느 동네. 내가 다니게 된 어느 작은 유치원에서 그를 만났다. 처음으로 등원을 하는 날 내 앞에 다가온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 굉장히 의기소침해져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낯가림까지 심한 내 성격이 한몫 더해 그저 원복을 입고 애꿎은 손만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고 인자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주는 선생님 덕분에 조금은 편안함을 느꼈다. “이름이 준형이지? 우리 준형이 씩씩하네? 울지도 않고. 앞으로 여기서 지내면서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언제나 행복하게 지내자..
분명히 나는 잠이 들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끝이 어디인지도 모를 만큼 펼쳐진 그저 새까만 암흑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리고 누군가를 찾기 위해 목청이 터질 만큼 소리를 지르고, 다른 이를 찾아다녔지만, 이내 곧 이곳에 존재하는 피조물은 나 하나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미친놈처럼 웃음부터 나왔다. “이 꿈 오랜만이네. 잊어버릴까 봐 무서워서 나타났나?” 내가 말을 한들, 꿈속이라 들어줄 이 하나 없었다. 그저 중얼거리며, 익숙한 듯 자리에 앉았다. 얼른 이 꿈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Rrrrrrr 귓가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오늘만큼 이 알람 소리가 반가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꾸는 악몽이라 인지하였어도, 한동안 머릿속이 멍한 느낌은 피해 갈 수 없..
무더위가 슬슬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 나는 어느 조그마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방금 태어난 아기에게 몽고점을 제외하곤 다른 특이하다고 할만한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아가는 네임이 없는 걸까?” “이제 막 태어났는걸. 차차 생기겠지. 여보.” 그렇게 나에게 네임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하신 부모님이셨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약 5개월하고도 반이 지났을 때, 내 몸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왼쪽 팔뚝에 조그마한 반점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저 점이 생긴 것이라고 여겼고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지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반점은 조금씩 커졌고, 옆으로 점점 길어졌다. 그리고 내가 다섯 살이 되었던 시절 희미했던 반점은 명확한 단어를 가리켰다. ‘용준형’ 사실 어렸을 ..
조금씩 시큰거리는 눈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며, 쓰고 있던 글을 잠시 멈추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날들이라 생각하였는데 이렇게 눈이 시려오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계절이 바뀌어 추워질 준비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책상 위에 놓여있는 달력을 바라보자 그 어떤 것을 정리하여도 용서받을 수 있는 12월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에 비례하여 두준이가 군대를 간지도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두준이를 보내면서 내가 입고 있었던 짧았던 소매의 티셔츠가 긴 팔로 변하기까지 지독하게도 느린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내 옆에 두준이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달력을 본 것이 화근이었을까. 한 번 내 머릿속을 자리 잡은 두준이의 생각은 빠져나가질 못하고, 두준이는 내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별할 것 없이 남들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름’과 ‘특별함’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주위의 사람들 덕분에 내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삶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다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어린 나이의 아이가 스스로 피아노에 손을 얹어 건반을 하나 누르는 것에도 주위에서는 ‘천재다.’ 혹은 ‘저 아이는 특별하다.’ ‘피아노에 재능이 있어서 그러니 피아노를 전공으로 해라.’ 등의 이야기를 쉽게 들었다. 그리고 그 ‘재능’을 ‘다름과 특별함’으로 인지한 주위 사람들 덕분에 부모님. 특히 엄마의 생각도 조금씩 변했고, 그로 인해 나는 더는 그 누구에게도 ‘힘들다. 하기 싫다’ 등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졸업하면 당분간 사라질 거야.” 처음엔 그저 장난처럼 내뱉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흔한 인사말도 없이 그저 ‘다녀올게.’라는 짤막한 카톡을 남기고는 로밍은커녕 분신처럼 들고 다녔던 핸드폰도 제 방에 고이 모셔두곤 훌쩍 떠나버렸다. 당혹감과 황당함 속에 그저 네가 무사하기만을 걱정했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그가 사라진 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별다른 일 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그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집 초인종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고, 초인종을 누른 장본인은 말도 없이 사라졌던 그. 용준형이 문 앞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또다시 밀고 들어오는 당혹스러움도 잠시 그저 반가운 마음에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러자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들어오는 네 모습에 그저 헛..
인적이 드문 어느 산속에 자그마한 불빛이 반짝인다. 그 앞으로 다가가자 젊은 남자 한 명이 작은 건물 앞에 놓인 평상에 앉아 한가로이 담배를 물고 있다. 그 옆에 앉아있는 새는 어린아이가 옹알이를 하듯 쉼 없이 남자를 향해 울었다. 그 모습에 남자는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옳거니. 오늘은 비가 많이 오겠구나. 손님이 많을 것 같으니 어서 준비하자꾸나.” 남자의 말은 새는 하늘로 날아올라 힘껏 울었다. 남자는 새의 지저귐에 웃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남자가 들어간 문 옆에는 작은 팻말이 붙어있다. ‘두준상회’ * - 딸랑 “어서 오시오.” 남자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여러 마리의 참새는 안에 가게 안에 놓인 횟대에 나란히 앉아 물방울이 맺..
강의가 끝나고 문을 나서자 역시나 내 어깨를 잡는 손길이 느껴진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에 머리를 쓸어넘기자 내 옆에 있던 기광이 살짝 눈치를 살피며, 먼저 가겠노라 인사를 한다. 그 모습에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보자 윤두준이 서 있다. "..." "밥은." "생각 없어요." "나랑 먹자." "선배. 원래 존나 바쁘고 인기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한테 이러시는 거 시간 낭비 같은데요. 전 피곤해서 자려고요." "같이 잘래?" 들려오는 마지막 말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도 내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떼어내곤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두준은 끈질겼다. 밥 먹으러 가자. 커피 마시..
“와. 시발. 존나 잘 생겼어.” “풉!” “... 야. 더럽게.” 갈수록 더워지는 날에 이기광과 함께 강의가 끝나고 남는 시간에 갈 곳도 없고 해서 카페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문을 열고 그가 들어왔다. 그런 그를 보자마자 내 입에서는 절로 감탄이 섞인 욕이 나왔다. 그런 내 말에 이기광은 머금고 있던 커피를 시원하게 뿜어냈고 입가를 닦으면 나를 바라보았다. “와. 씨. 그런 말은 사전에 공지를 좀 하고 해.” “사전 공지를 어떻게 하냐. 우리 기광이 생각이 있어? 없어?” 나의 책망이 담긴 말에 기광이는 눈을 가늘게 떠 나를 흘겨보더니 이내 말을 건넸다. “그래그래. 그렇다고 치자. 누가 또 존나 잘생기셔서 용준형이 이런 말까지 하셔.” 들려오는 기광이의 질문에 다른 말없이 그저 턱짓으로..
- Rrrrrrrrrr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람에 조금은 지친 듯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천천히 일어나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아직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여유로웠지만,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향했다.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조금은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다. 학교 근처에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다시 카페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단조로운 생활이지만 그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난했다. 갑자기 가세가 기운 것도 아니고 그저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다. 아무리 가난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보아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형편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가족들이 나에게 주는 부담에 어릴 적부터 내..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처럼 지독한 사랑을 했다.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열렬하고도 지독히도 사랑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에도 끝이 있었다. 사소한 다툼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가슴에 앙금을 남겼고 그를 담고 있는 가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가슴에 남은 앙금은 점점 더 쌓여만 갔고 금이 간 곳은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 벌어진 틈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메꿀 수가 없었다. 그렇게 벌어진 틈새로 쌓여간 앙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지쳐 사소한 문제를 참지 못하고 이별했다. 그렇게 사소함에 지쳐 헤어짐을 맞이했던 나는 그 후에 만난 사람과도 서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별했다. 한 번 틀어진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웠..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보통의 날들을 보내며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오면서 무언가에 대해 크게 머리 복잡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을 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저 될 대로 되겠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시간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감수해야지. 내 인생 내가 책임지고 사는 거지 부모님이나 옆에 있는 친구 놈들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사람이 또 그 상황에 닥치게 되면 또 어떻게든 해결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개썅마이웨이? 이 정도일 것이다. 그런 나의 성격을 잘 알고 계신 부모님께서도 특별한 무언가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어릴 적부터 나에게 하셨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