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처럼 지독한 사랑을 했다.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열렬하고도 지독히도 사랑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에도 끝이 있었다. 사소한 다툼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가슴에 앙금을 남겼고 그를 담고 있는 가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가슴에 남은 앙금은 점점 더 쌓여만 갔고 금이 간 곳은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 벌어진 틈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메꿀 수가 없었다. 그렇게 벌어진 틈새로 쌓여간 앙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지쳐 사소한 문제를 참지 못하고 이별했다.
그렇게 사소함에 지쳐 헤어짐을 맞이했던 나는 그 후에 만난 사람과도 서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별했다. 한 번 틀어진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웠다. 아니, 나는 회복하려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사랑에 있어 신뢰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저 서로가 사소한 것이라도 맞지 않으면 갈라서면 된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혔다.
그 어떤 사람을 만나 그 얼마나 열정적인 사랑을 한다 해도 그 사랑의 끝엔 항상 이별이 있음을 생각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상대방에게 그저 불쾌감을 주지 않을 정도의 선을 유지했다. 나의 마음을 포함하여 그 어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보여준 적이 없다. 모든 것을 보여주고 상대방에게 주어봐야 어차피 서로는 남이 될 테니. 이러한 마음으로 사랑을 하니 당연히 상대방과는 긴 연애를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과의 헤어짐을 마주하고 있을 때 그는 따스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단 한 번이라도 아니 단 한순간이라도 날 사랑했니?”
“응. 매 순간 최선을 다했어.”
“... 나중에 시간이 흘러 네가 정말 너의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준형아. 네가 온전히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따스한 눈빛과 따스한 말투였지만,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람과의 헤어짐을 마지막으로 아직 새로운 사랑을 만나지도 않았고, 그저 그렇게 의미 없는 날들만 하루하루 흘러가고 있었다. 점차 더워지는 날씨에 감은 두 눈이 절로 떠진다. 눈이 떠짐과 동시에 한동안 비어있었던 맞은편 집이 유난히 시끄럽다는 것을 느꼈다. 그저 창문만 열면 바로 맞은편 집과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기에 어렵지 않게 소음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어차피 잠을 더 자기는 틀렸다 싶어 얼음을 가득 넣은 커피를 들고 창문에 기대어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으니, 맞은편 집 테라스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마주했는데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기에 머쓱하여 작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남자는 별안간 환하게 미소를 짓더니 나에게 말을 건넨다.
“여기 사세요? 저 오늘 이 집으로 이사 왔어요. 앞으로 자주 봬요.”
“아, 네. 그러시구나.”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아, 저는 윤두준이라고 합니다.”
“저는 용준형이라고 해요.”
“앞으로 잘 지내요. 준형 씨.”
그의 미소는 밝은 햇살 같았다. 너무나 눈이 부셔 차마 온전히 두 눈을 뜨고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빛이 났다.
*
그 뒤로도 두준 씨와 특별하다고 느낄만한 것은 없었다. 그저 어쩌다 밖에서 마주치면 서로 인사를 하고, 작업하다 문득 창밖으로 바라보다 시선이 마주치면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저 너무나 평범해서 그냥 내 하루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있는 것 같았다.
하루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자꾸만 귓가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창문에서 톡-톡- 소리가 들려 마시고 있던 머그잔을 들고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문이 열림과 동시에 외마디 비명이 들리고, 내 발밑으로 작은 조약돌 하나가 떨어진다. 의아함에 허리를 굽혀 돌을 줍자 두준 씨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으며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를 건넸다.
“그냥 오늘 준형 씨 얼굴 보고 싶어서요. 온 동네 소문날까 봐 이름을 크게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생각난 게 이거더라고요. 혹시 창문에 금이 가거나 깨지면 말씀하세요. 변상해드릴게요.”
들려오는 두준 씨의 말에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타인에 의해 웃어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직도 미안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두준 씨에게 작게 헛기침을 하여 목을 가다듬고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두준 씨. 그나저나 이 돌은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나의 질문에 두준 씨는 테라스에 놓인 자그마한 화분을 가리켰다. 아, 저 화분에 있는 돌이구나. 한참을 고민하다 화분에 있는 돌을 주워 창문에 던졌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또다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꼬리가 올라간다. 웃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두준 씨가 있는 쪽으로 팔을 뻗어 들고 있던 머그잔을 건넸다. 그러자 그 역시 팔을 뻗어 건네준 머그잔을 손에 쥐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해살한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오후. 우리는 그렇게 마주 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테라스에 나와 떨어져 있는 조약돌을 줍다 보니 그 양이 꽤 되어 보인다. 그만큼 두준 씨와도 만남도 잦았다. 두준 씨가 돌을 더 던졌다가는 화분에 돌들이 다 사라질 것 같은 느낌에 방으로 들어가 돌을 담을 수 있는 작은 주머니를 찾았다. 그리고는 주머니 안에 조약돌과 함께 간단한 메모를 적은 종이를 곱게 접어 넣은 뒤 맞은편 두준 씨의 테라스에 주머니를 던졌다.
거창한 메모는 아니었다. 그저 이 방에 불이 켜져 있을 때 돌을 던지면 바로 열어보겠노라. 이 정도의 메모였다. 그리고 내가 던진 주머니를 두준 씨에게 잘 전달되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아도 그날 저녁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두준 씨는 자신의 집과 가장 가까운 이 방에 불이 켜지면 돌을 던졌다. 그 소리에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면 두준 씨는 항상 멋진 미소와 함께 나를 반겨주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우리는 서로에 대한 많은 것을 공유했다. 각자의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커피를 나눠마시기도 하고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서로의 많은 부분을 공유했다. 그럴 때마다 두준 씨는 예의 그 근사한 미소로 나를 맞이하여 주었다. 어쩌면 나도 두준 씨와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는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두준 씨가 출장을 가게 되어 지금은 나 혼자 남아 방에서 작업하고 있다. ‘혼자 남았다.’라는 생각을 하자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감정이 그가 곁에 없자 유난히도 외롭고 쓸쓸하게 다가왔다. 두준 씨가 출장을 가게 되었다고 어렵사리 말을 꺼내었을 때도 이 정도까지로 외롭고 쓸쓸할지 몰랐다. 그때는 웃으며 조심히 다녀오라 대답을 했을 정도니 말이다.
아무리 불이 켜진 방에 혼자 앉아 5분 간격으로 창문을 바라보아도 자그마한 돌이 날아와 부딪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렇기에 멋진 미소로 나를 반겨주는 두준 씨도 없었다. 그저 나 혼자 덩그러니 불이 켜지지 않은 어두운 두준 씨의 방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생각에 잠기려는 와중에 핸드폰의 알람이 울린다. 이 시간에 누가 연락을 했나 싶어 확인하니 지금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던 두준 씨다.
- 뭐하고 있어요? 이 시간엔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보고 싶어요.
거창한 말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듯 지극히 평범한 말투를 보고 있자니, 그 순간 아무렇지도 않았던 나의 그저 그랬던 생활이 그로 인해. 두준 씨로 인하여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언가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두준 씨에게 바로 답장을 보냈다.
- 얼른 와요. 나도 보고 싶어요.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너무나 오랜만이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을 일시적으로 착각하는 건가 싶어 두준 씨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두고두고 생각해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내린 결론은 사랑이었다. 사랑이 맞았다. 사랑이 아니라면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 딩동.
깊이 생각을 하는 도중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에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놀라 얼른 달려가 비치는 인영을 확인하니 두준 씨가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문을 열고 그를 반겼다. 자세히 보니 두준 씨는 출장에서 돌아온 뒤 본인의 집에는 들르지도 않고 우리 집으로 바로 온 듯한 차림이었다. 그리고 양손에는 가득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의아함을 담고 시선을 마주하자 두준 씨는 쑥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제가 간 곳에 유명한 것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테라스가 아니고 이렇게 준형 씨랑 마주 보고 하나씩 다 먹어보려고요.”
아, 햇살처럼 눈이 부신 이 사람은 어느새 내 마음에 스며들어와 이렇게도 나를 설레게 한다. 눈이 부심에 햇살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았던 나의 과오였다. 하지만 피하지 않았기에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그저 그런 날들은 이 사람을 만난 후부터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거창하니 특별하지 않아도 함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특별하고 행복하다. 아마도 내 앞에 있는 이 사람과의 인연이 끝나는 그날이 오면 나는 또다시 그저 그런 날들을 보낼 것만 같다.
나의 햇살과도 같은 그대에게 감사를.
'짤막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투준] 장난스런 연애 (0) | 2018.08.23 |
---|---|
[투준] 인연 (0) | 2018.08.18 |
[투준] ordinary (0) | 2018.08.08 |
[투준] 호 랑(狐 狼) (0) | 2018.08.02 |
[투준] 여름향기 (0) | 2018.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