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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rrrrrrrrr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람에 조금은 지친 듯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천천히 일어나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아직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여유로웠지만,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향했다.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조금은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다. 학교 근처에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다시 카페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단조로운 생활이지만 그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난했다. 갑자기 가세가 기운 것도 아니고 그저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다. 아무리 가난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보아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형편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가족들이 나에게 주는 부담에 어릴 적부터 내 어깨는 항상 무거웠고, 감당하기 버거웠기에 일찌감치 독립했다. 학교 근처의 작은 원룸을 구해 쪽잠을 자면서 아끼고 또 아끼면서 하루를 버티고 또 버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학금은 수업료의 면제일 뿐. 장학금의 제외한 모든 생활비는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고, 살아가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고 다는 중, 학교 주변에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카페에서 운이 좋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사장님의 이런 나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주셔 시간과 돈 모두 부족함 없이 챙겨주신다.
오늘도 역시 강의를 가기 전에 카페 오픈을 시작으로 나의 하루도 시작된다. 신선한 원두를 갈아내자 크지 않은 카페에는 커피향이 그윽하게 퍼져, 이내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나의 질문에도 상대방은 대답도 없이 그저 나와 메뉴판 사이 그 언저리쯤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의아함에 다시 한번 상대방에게 말을 건넸다.
“저, 손님? 주무하시겠어요?”
“... 아! 아,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내 질문에 깜짝 놀랐는지 남자는 어깨까지 움츠리며 간신히 대답했고, 카드를 내밀었다. 건네진 카드를 받아보니 학생증으로 쓰이는 체크카드이다. 슬쩍 곁눈질로 학생증을 살펴보니 나와 같은 학교에 미대와 관련된 학과인 듯싶었다. 아, 그래서 화구통을 들고 있었구나. 가난으로 인하여 예체능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어릴 적부터 예체능을 하는 학생들을 보면,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래서 나는 미래의 대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문과계열로 지원을 하였다. 순간 머릿속을 파고드는 씁쓸함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가 원하는 꿈과 미래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진 커피에 얼음을 가득 담아내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남자에게 건넸다. 그러자 남자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고 바로 뒤돌아섰다. 그렇게 돌아선 남자의 귀가 살짝 붉게 변한 것도 같았다.
그렇게 첫 만남을 시작으로 남자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항상 같은 시간에 찾아와 아이스커피를 시켰고, 목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는 항상 같은 시간에 찾아와 같은 메뉴를 시켰다. 어느 날은 커피를 시키고 여유를 부리는 날도 있었고 어느 날은 바로 테이크아웃하여 나가는 날도 있었지만, 그 남자는 항상 같은 시각에 찾아왔다.
그렇게 하루 이틀 만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점점 궁금증이 더해갔다. 살아오면서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기에 연애를 해보기는커녕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에 서툴렀다. 나 혼자 살아가기도 바쁜 날들에 타인에게 주는 관심은 그저 사치라고 생각이 들 만큼 나의 생활은 여유롭지 못했다. 한두 번이야 스쳐 지나갈 수 있다고 하지만 매일같이 카페에 들려 커피를 사고 심지어 학교 안에서 만나게 되면 티가 나지 않게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남자가 궁금해져 갔다.
깊어지는 여름의 어느 날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에게 관심이라는 것이 생겼다.
어김없이 다음 날에도 그 남자는 출석 도장을 찍듯이 같은 시간에 카페에 들어왔다. 괜스레 웃음이 났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평소와 다르게 건네진 말에 그는 당황해하며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질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동그랗게 뜨곤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 모습을 보던 그의 얼굴은 점차 발갛게 물들어갔고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께가 간질거렸다. 그의 입을 통해서, 그의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러면서 학교 안에서 스쳐 지나갔던 이야기도 함께 건네자 그는 쑥스러움에 목덜미를 갉작이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그의 이름은 윤두준. 역시나 미대였다. 그중에서도 현대미술을 전공한다고 했다.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문득 시계를 보더니 강의에 늦겠다며 한걸음에 카페를 나갔다. 그가 나간 이후로도 나는 한동안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두준. 윤두준. 무더운 여름날의 푸르른 녹음과 함께 한 줄기 빛처럼 나에게 다가온 사람이었다.
*
그 뒤로 우리는 제법 이야기도 하며 친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냐면 방학이 지나고 나란히 앉아 같이 수강신청을 진행할 만큼? 나란히 노트북을 켜고 전공 및 교양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두준이 나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말을 건넨다.
“준형아. 우리 이 교양 같이 들을까?”
“응? 이거 인문대 교양이네? 너랑은 전혀 상관없는 교양이잖아.”
“그래도. 너랑 같이 듣고 싶어.”
두준이가 듣고 싶다는 교양을 살펴보자 대형 강의로 진행되는 교양이었다. 우리는 학부와 전공도 달라 서로의 접점이 없어 강의를 단 한 개도 같이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자 두준이는 이런 법은 없다면서 다음 학기에는 기필코 같이 듣겠다는 의지를 표출했고 기어코 우리의 시간표에 교양을 집어넣었다. 나는 전공 필수나 졸업요건은 이미 예전에 맞춰 놓은 상태라 교양 하나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교양 강의. 그것도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과 함께 듣는 강의를 신청한 것은 대학생활을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항상 내 삶에 지쳐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자꾸만 일어났지만, 그것이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준이와 함께여서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어 나뭇잎들이 하나씩 색을 입을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는 같은 강의실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하루는 자리에 앉아있는데 유독 두준이의 표정이 좋지 않아 조심스레 물어보자 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졸업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교수님들이 직접 심사형 통과하지 못하면 졸업을 하지 못한다고 하며 그 주제는 본인이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제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히려 이런 주제가 더 어렵다며 인상을 찡그리는 두준이에게 그림에는 문외한인 나는 아무런 위로도 해주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참, 머리를 쓰다듬었다고 하니 처음 교양을 들으러 온 날이 기억난다. 나는 전공의 특성상 항상 리포트와 시험에 익숙해져 있어서 괜찮았지만 두준이는 사정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갑자기 책상에 고개를 파묻듯 엎어지며 우는 소리를 냈다.
“... 리포트라니 생각도 못 했다.”
“그럼 항상 실기로만 대체했어? 그래도 1학년 때는 이론 수업도 있지 않았어?”
“... 생각 안 나. 몇 년 전 일인데...”
한참을 생각하던 두준이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런 두준이의 모습에 잔뜩 풀이 죽은 강아지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두준이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두준이 역시 눈을 감고 내 손길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아무튼 졸업 작품 이야기를 한 이후에 두준이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두준이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괜스레 가슴이 더욱 세차게 뛰는 기분에 내가 먼저 시선을 돌리곤 했다. 하지만 두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턱을 부드럽게 감싸고는 자신의 쪽으로 돌려 내 얼굴을 또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귓가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두준이는 이내 두 눈을 활짝 접어 웃으며 나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준형아. 나 졸업 작품 정했다.”
“어? 정말? 어떤 걸로?”
“용준형. 너를 캔버스에 담을 거야.”
두준이의 대답에 깜짝 놀라 잘못 들었나 싶어 두준이를 바라보자 환하게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장난이 아니고 진심인가 싶어 두준이를 바라보자 그의 눈동자엔 오롯이 나만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내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지는 것도 모르고 두준이에게 말을 건넸다.
“무, 무슨 소리야. 두준아. 나를 담다니.”
“이번 졸작 모델은 너야. 준형아. 잘 부탁해.”
“마, 말도 안 돼.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하지만 너무나 확고한 두준이의 모습에 더는 부정하지 못하고 그날 모든 강의를 마친 후, 두준이의 손에 이끌려 자취방에 가게 되었다. 자취방 한쪽에는 두준이 작업하는 캔버스를 비롯하여 여러 미술재료들이 정리되어 있었고, 우리는 작은 식탁에 앉아 축하파티를 하자며 사 온 맥주를 마셨다. 사실 맥주를 마시면서도 엄청난 협박과 윽발을 질렀지만, 두준이는 내가 모델을 해주지 않으면 줄작을 내지 않겠다고 반대로 협박을 하여 겨우겨우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겨울 방학을 시점으로 하여 작품에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두준이의 졸업 작품 모델이 되었다.
나를 그리는 도중 두준이는 한 번도 나에게 그림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내심 서운하기도 했지만 완성되면 전시회에 와서 보라는 두준이의 말에 참고 또 참았다. 참, 아르바이트 역시 잘 다니고 있다. 두준이를 만나면서부터 삶에 조금 여유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처음을 타인을 생각했고, 또 웃으며 보낼 수 있고,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것에 대해 감사를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새하얀 눈이 내려 모든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나무들 위에도 한껏 쌓인 눈을 창문을 통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도 모르는 사이 두준인 내 앞으로 다가와 내 턱을 감싸 제 쪽으로 돌린다. 그리고 다가오는 두준이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날 온통 하얗게 변한 세상 위로 빨간색 물감이 떨어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퍼져나가듯 내 마음속에도 그렇게 두준이가 점점 퍼져나갔다. 처음으로 따뜻한 그의 입술을 느끼며 오롯이 서로의 체온만을 느꼈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커튼을 치지 않아 밝아지는 밖을 보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 움직임에 두준이 역시 뒤척이며 나를 끌어안았다. 두준의 품에서 나를 감싸 안고 있는 팔의 온기를 느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나의 삶을 어지럽게 흐트러트리기 위해 나타난 늑대인가. 아니면 이런 나를 불쌍히 여겨 나를 위로해주기 위하여 구원하러 온 개인가.’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도 잠시. 그 무엇도 가늠할 수 없게 아침이 되려고 떠오르는 태양의 빛은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키스를 한 이후로 더욱 빠르게 깊어졌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두준이의 모델이 되어 캔버스 앞에 섰고, 그런 나를 두준이는 가만히 두지 않았다. 입을 맞추고 그러다 본인이 예상한 시각보다 빠르게 작업을 마치게 되면 우린 관계를 맺었다. 그렇게 두준이의 침대에 누워 감고 있는 두준이의 눈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내 손을 잡고 입술을 묻는다. 그리고는 입술을 열어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사랑해. 준형아.”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졸업 작품 전시회 기간이 다가왔고 계절이 변하는 동안 두준이는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 역시 나를 불쌍히 여겨 위로해주기 위해 나타난 두준이의 곁에서 항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내 손 위에 놓여진 초대장을 들고 드디어 작품을 보러 간다.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내가 모델인 두준이의 졸업 작품. 가슴이 세차게 뛰면서도 묘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작품 앞에 서자 내 온몸이 심장으로 변해 뛰는 것처럼 이로 말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뛰었다. 두준이가 보는 용준형은 저렇구나. 새하얀 캔버스 위에 그려진 나는 그 누가 보아도 사랑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고개를 돌려 작품명을 살펴보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었다.
- 이 세상 가장 간절히 원하고, 가장 사랑하는 이 (윤두준 作)
내 삶에서 처음으로 욕심이 생겼다. 윤두준이 언제까지라도 나의 곁에 있길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에 빠진 나의 곁으로 다가온 두준이의 인기척을 느끼고 가만히 손을 뻗어 두준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내 손을 더욱 힘 있게 쥐는 그의 행동에 가슴이 벅차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런 나를 알았는지 두준인 손을 들어 내 눈가를 살짝 쓸어내려주었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보인다. 나 역시 환하게 웃으며 내 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내 마음을 전했다.
“내가 있는 곳으로 와주어서 고마워. 우연은 네가 만들었다면 앞으로의 인연은 내가 만들어나갈게. 사랑해. 두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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