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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새까만 천이 서서히 벗겨졌다. 갑작스레 비춰오는 빛을 받아내느라 내 동공은 한없이 작아졌고, 그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눈을 감기 전 얼핏 보였던 실루엣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마른 입술을 열었다.
“저... 지금이 며칠이에요?”
내 말소리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두려움에 감은 눈을 뜰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술만 지그시 물어댔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났을까.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타고 들어왔다.
“... 21일.”
내가 시간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일 저녁. 그것도 퇴근 후, 차에 오르기 위해 휴대전화를 보았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들리는 목소리에 살짝 눈을 뜨곤 앞으로 바라보자 그 앞엔 표정도 없이 그저 아무것도 담지 않은 서늘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오히려 나를 배려라도 하듯 한걸음 뒤로 물러나 주었다.
그의 행동에 나 역시 용기를 얻은 것일까.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자 그저 평범한 통나무로 만들어진 집이었다. 그 안에 나는 의자에 앉혀 꼬박 이틀 밤을 지새운 것이다. 고갤 숙여 내 몸을 천천히 살펴보자 내가 퇴근했을 때 입고 있었던 그대로였고, 그저 가느다란 끈으로 내 손과 발만 묶여있었을 뿐이다.
누구에게 원한을 맺을 만큼 못되게 살지 않았고, 그저 회사를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나를 납치하라고 시킨 사람은 누구일까. 그렇지 않다면 저 남자는 내 몸값을 요구하는 사람일까? 갑자기 드는 궁금함에 고개를 들어 남자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입술을 열었다.
“D 그룹 숨겨둔 아들. 용준형 당신 맞지?”
“아...”
“지금 눈을 보니 누가 시켰는지 궁금하겠지.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니 외딴 숲속에 납치되어있다니.”
“...”
그렇다. 나는 알려지면 안 될 존재이다. 함부로 입을 놀릴 일도 없었지만, 그룹에서는 나를 못마땅한 존재로 여겼다. 그렇다고 매번 나를 감시하는 사람을 붙여놓기도 만만치 않을 테니. 그들이 선택한 것은 자신들의 옆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나를 두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들어온 회사였다.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왔는데 갑자기 왜?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회장님. 즉 나의 할아버지 되시는 분께서 나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나를 꽤나 측은하게 바라보셨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그들로서는. 거기다 회장님께서 권력에서 물러나시겠노라 선언하시며, 비어있는 권력을 향한 그들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나는 그 싸움에 휘말리게 된 것 같다.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는 내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굽혀 나와 비슷한 눈높이를 맞추며, 손목을 묶고 있던 끈을 풀어주었다. 조금씩 끈이 풀려 느슨해지자 왼쪽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그 모습에 남자는 오른쪽 손목을 붙잡고 있던 끈 역시 풀어내며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을 열어 말을 건넸다.
“대충 무슨 생각 하는지 알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야.”
“반대... 요?”
“뭐, 상세히 알 필요는 없고, 욕실은 저쪽이다. 우선 좀 씻고 밥부터 챙겨라. 갈아입을 옷은 욕실 안에 넣어 놨다.”
납치된 거 아니었나? 아니면 죽기 전에 배불리 먹이고 죽이려는 건가?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으니 오히려 남자가 이상했나 보다. 나를 빤히 바라보다 내 앞으로 손을 내민다. 그 모습에 어깨를 흠칫 떨어내자 남자는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불편한가?”
너무나 다정하게 들린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내 앞에 놓인 그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고는 욕실 문 앞까지 친절히 나를 데려다주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 서서히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사실 이러한 여유는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 어색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보송한 수건을 들어 물기를 머금고 있는 머리칼을 털어내며 그 남자가 가져다 놓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맛있는 냄새가 내 코끝에 닿는다.
“배고프지. 이리 와.”
내가 나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는 먹음직스럽게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저... 저는 이게 최후의 만찬인가요?”
“무슨 소리지?”
“이거 다 먹으면 깔끔하게 죽이실 건가요?”
나의 질문을 끝으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는 크게 웃으며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이리저리 헝클었다. 그러자 점점 달아오르는 내 얼굴이 느껴지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내 앞에 자리 잡고 앉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용준형 안 죽으니까 걱정 말고 많이 먹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허기가 져 숟가락을 들고 정말 맛있게 밥을 먹었다. 우리는 그렇게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숨이 막힐듯한 어색함 사이에서 식사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모든 것이 편안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마냥 편했다.
밥을 먹고, 딱히 할 것도 없어 멍하니 앉아 있으니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는 윤두준이라고 해.”
“아, 두준 씨...”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읊조리자, 그는 웃으며 내 앞에 사진 한 장을 건네주었다. 사진을 바라보니, 언제 찍힌 것인지도 모르게 찍혀있는 내 모습이 찍혀있었다.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낫네.”
“아, 언제 이런 걸...”
“듣자 하니 책 좋아한다며. 여기는 어차피 핸드폰도 안 터지니까 줄 순 없고. 바깥세상은 궁금해하지도 마.”
“...”
“보고 싶은 책 있으면 말해. 구해다 줄게.”
“... 감사합니다.”
“납치당하신 분이 감사하긴.”
“아... 그렇죠. 저기... 아무도 절 찾지 않으시나요...?”
그는 대답하기가 곤란하다는 듯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납치라고 하기엔 이상한 점이 많았다. 이틀 동안 의자에 묶여있었던 것치곤 아픈 곳도 없었고, 두준 씨도 너무나 잘해주어 납치가 아닌 어느 한적한 곳으로 휴가를 온 기분이 들었다.
*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납치’에 관한 모든 궁금증은 묻어두기로 했다. 궁금하다고 하여 두준 씨가 대답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종일 집에 있으면서 두준 씨와 아침을 함께 먹고, 두준 씨가 일을 하러 가면 나는 조용히 책을 읽었다. 그리고 가끔은 내가 저녁을 하고 두준 씨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함께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나의 일상생활 모든 것을 두준 씨와 함께 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나의 생활이었던 것처럼.
회장님이 물러나신 후 회사는 나의 아버지와 배다른 큰형이 함께 맡았다는 소식을 두준 씨가 전해주었다. 결국은 그렇게 되었구나. 숨겨진 아들인 나는 앞으로도 숨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내 운명인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 두준 씨와 이렇게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며, 소중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두준 씨를 바라보자 그대로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아준다. 그의 품이 너무나 따뜻해 두 눈을 감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손을 들어 내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 부드러워 나도 모르게 그에게 더욱 파고들었다.
“준형아.”
“... 응.”
“이 생활 불편해?”
“아니. 두준 씨.”
나의 대답에 두준 씨는 내 어깨를 잡고 살짝 품에서 떼어내어 내 이마에 입술을 맞춘다. 듣기 좋은 소리가 나고 다시 한번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당신. 왜 납치됐는지 궁금하지?”
“...”
“당신 할아버지. 전대 회장님 지시였어.”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준 씨를 바라보자 그 역시 일어나 손을 들어 내 굳어있는 뺨을 쓸어내린다. 그리고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당신 할아버지가 그동안 당신 고생했다고, 남은 생은 우리와 얽히지 말고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거든. 하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집안에만 살짝 정보를 흘리고 데리고 가라고 하셨지. 이런 진흙탕 싸움에 당신이 있기에는 안쓰럽다고.”
그의 입을 타고 나오는 말에 나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나를 죽이려고 납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시려고 납치를 꾸미셨다는 할아버지 말씀에 눈물이 고였다. 그 모습을 알았는지 그는 손을 들어 내 눈가를 훑어냈다. 그런 그의 손을 붙잡고 나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 그럼 당신은...?”
“나? 나는 당신 할아버지를 곁에서 모신 비서실장의 아들.”
“...”
“아버지 따라 몇 번 왔다가 당신 모습에 반했거든. 그래서 이 계획에 나를 끼워달라고 아버지께 몇 날 며칠을 빌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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