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끝나고 문을 나서자 역시나 내 어깨를 잡는 손길이 느껴진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에 머리를 쓸어넘기자 내 옆에 있던 기광이 살짝 눈치를 살피며, 먼저 가겠노라 인사를 한다. 그 모습에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보자 윤두준이 서 있다. "..." "밥은." "생각 없어요." "나랑 먹자." "선배. 원래 존나 바쁘고 인기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한테 이러시는 거 시간 낭비 같은데요. 전 피곤해서 자려고요." "같이 잘래?" 들려오는 마지막 말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도 내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떼어내곤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두준은 끈질겼다. 밥 먹으러 가자. 커피 마시..
“와. 시발. 존나 잘 생겼어.” “풉!” “... 야. 더럽게.” 갈수록 더워지는 날에 이기광과 함께 강의가 끝나고 남는 시간에 갈 곳도 없고 해서 카페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문을 열고 그가 들어왔다. 그런 그를 보자마자 내 입에서는 절로 감탄이 섞인 욕이 나왔다. 그런 내 말에 이기광은 머금고 있던 커피를 시원하게 뿜어냈고 입가를 닦으면 나를 바라보았다. “와. 씨. 그런 말은 사전에 공지를 좀 하고 해.” “사전 공지를 어떻게 하냐. 우리 기광이 생각이 있어? 없어?” 나의 책망이 담긴 말에 기광이는 눈을 가늘게 떠 나를 흘겨보더니 이내 말을 건넸다. “그래그래. 그렇다고 치자. 누가 또 존나 잘생기셔서 용준형이 이런 말까지 하셔.” 들려오는 기광이의 질문에 다른 말없이 그저 턱짓으로..
- Rrrrrrrrrr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람에 조금은 지친 듯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천천히 일어나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아직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여유로웠지만,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향했다.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조금은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다. 학교 근처에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다시 카페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단조로운 생활이지만 그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난했다. 갑자기 가세가 기운 것도 아니고 그저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다. 아무리 가난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보아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형편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가족들이 나에게 주는 부담에 어릴 적부터 내..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처럼 지독한 사랑을 했다.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열렬하고도 지독히도 사랑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에도 끝이 있었다. 사소한 다툼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가슴에 앙금을 남겼고 그를 담고 있는 가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가슴에 남은 앙금은 점점 더 쌓여만 갔고 금이 간 곳은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 벌어진 틈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메꿀 수가 없었다. 그렇게 벌어진 틈새로 쌓여간 앙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지쳐 사소한 문제를 참지 못하고 이별했다. 그렇게 사소함에 지쳐 헤어짐을 맞이했던 나는 그 후에 만난 사람과도 서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별했다. 한 번 틀어진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웠..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보통의 날들을 보내며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오면서 무언가에 대해 크게 머리 복잡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을 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저 될 대로 되겠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시간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감수해야지. 내 인생 내가 책임지고 사는 거지 부모님이나 옆에 있는 친구 놈들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사람이 또 그 상황에 닥치게 되면 또 어떻게든 해결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개썅마이웨이? 이 정도일 것이다. 그런 나의 성격을 잘 알고 계신 부모님께서도 특별한 무언가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어릴 적부터 나에게 하셨던 ..
狐 : 여우 호 狼 : 늑대 랑 * ‘너는 앞으로 이 랑(狼)의 가문을 지켜야 한다.’ 내가 어릴 적.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귀에 피딱지가 얹히도록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 어린아이에게 왜 그렇게 힘든 부탁을 하였을까. 본인들도 지키기 힘든 가문의 영광을 왜 그 어리고 어렸던 나에게 맡겼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나는 조금 더 커버렸다. 그래서 그냥 내 운명이겠거니.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벗어날 수도 없는 상황이고, 내가 죽어야만 끝나는 이야기이기에 아주 조금 짜증이 나지만,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늑대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는 랑(狼)의 가문이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학명에 따라 나뉘면서 우리는 개과에 속하며, 이 개과에는 여러 가문이 있다. 내가 속한 늑대와 ..
*'투준빌리지 여름 호'에 올렸던 단편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우리의 관계에 특별함은 없었다. 그저 서로가 곁에 있는 것을 당연하다고 느꼈다. 하늘이 밝아지고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아침이 되었음을 알게 되고, 시간이 지나 태양이 지고 어두워져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밤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자각하는 것처럼 우리 관계도 그러했다. 내 곁에 네가 있는 것이, 또 너의 곁에 내가 있는 것이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웠고 그만큼 당연했다. 같은 대학을 다니면서 준형이에게 우정이 아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준형이도 같은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설렘은 지금도 여전하다. 나에게 항상 가슴 간질거리는 설렘과 꽃보다 진한 향을 전해주고, 그 어떤 백일몽보다 ..
간지러운 마음 W. 이상&더블제이 Part 1. 준형ver. 왠지 모를 것으로 내 마음이 간질거림을 느끼게 되면 무엇보다 불안감이 먼저 심장을 찔렀다. 그 간지러움이 혹시나 커져 마음을 움직일까, 흘러나오는 사랑 노래, 사랑 소설들을 피했다. 그 간지러움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낙인찍힐까, 그래서 사랑이라는 우물에 빠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목이 죄인 채 허우적거릴까. 감정이 점점 고조되어 머릿속에 멋대로 피어오르는 불길한 서운함과 배신감에 깊이 다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장벽을 쌓았다. 불안이라는 장벽으로 간지러움을 억누르고 억누르는 것이다. 나조차 더 이상을 알아챌 수 없도록. - 그와 친해진 계기는 자연스럽고, 이상할 것 없었다.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한 회사에 입사동기로 들..
내가 용준형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고등학교 1년 때이다. 도수가 엄청 높은 동그란 안경 덕분에 작아 보이는 눈과 가뜩이나 작아 보이는 눈마저 덮어버리는 덥수룩한 머리. 한껏 움츠러든 어깨는 누군가와 부딪히기만 해도 기겁을 하며 사과를 해댄다. 그럼 대부분 애들은 사과를 받기보단 짜증이 난다는 듯 부딪힌 어깨를 털어내며 준형이의 어깨를 일부러 세게 치고 지나간다. 그래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돌아서서 본인의 갈 길을 가는 그게 바로 내가 아는 용준형이었다. “하아. 용준형. 애들이 뭐라고 하면 같이 좀 뭐라고 해. 왜 맨날 당하고 있냐.” “... 괜찮아. 내가 잘못했나 보지...” “아니, 니가 뭘 잘못해. 부딪히고 간 새끼들이 잘못한 거지.” “... 그 앞에 서 있던 내 잘못이야...
숙취 : 술에 몹시 취한 뒤의 수면에서 깬 후에 특이한 불쾌감이나 두통, 또는 심신의 작업능력 감퇴 등이 1∼2일간 지속되는 일을 말한다. “으... 머리야. 몇 시야...” 겨우 손을 들어 핸드폰을 보자 오전 11시 30분을 알려준다. 수많은 부재중 전화와 카톡이 이미 나는 오전 수업을 놓쳤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나도 그대로 포기해버렸다. 내가 두 번 다시 이렇게 술을 마시면 용준형이 아니고 견준형이다. 견준형. 수도 없이 많이 쌓여있는 카톡 중 유독 윤두준의 이름이 보인다. - 야. 잘 들어갔냐. - 야. 아직 자냐? - 수업 시작했어. - 전화는 왜 안 받아. - 일어나면 전화해. 등의 연락이. 분명 어제 함께 술자리에 있었는데 술은 나 혼자 마셨나보다.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멀쩡한 거야. 카톡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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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이게 아니라고.” 원고를 쓰다 말고 키보드를 내리쳤다. 내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내용에 그저 한숨이 난다. 우악스럽게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집어 던지곤, 깊은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제야 노트북의 모니터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시야가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시선을 돌려 책상에 놓인 달력을 보자 출판사에서 요청한 마감 일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덥석 연재물을 하겠다고 수락한 것이 화근이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지내다가는 내 삶에 대한 여유도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번 호를 넘기고는 당분간 휴재하겠다고 출판사에 이야기를 해야겠다. 도저히 압박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우선 휴재는 휴재더라도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 ..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씩 이 지독한 짝사랑의 끝을 생각해보곤 했다. 과연 그 끝에는 나는 네 곁에 서 있을지, 아니면 그저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남을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나의 짝사랑이 끝나지 않았기에. 혼자만의 사랑을 간직한 체 그와 끊임없이 몸을 섞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욕구를 풀기 위해서이고, 나는 그런 그의 옆이라도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처음 섹스를 요구하는 그의 모습에 허락했다. 이제는 그의 손짓, 눈짓만으로도 그가 원하는 자세를 잡았고 그는 거칠고,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물론 나에 대한 배려 역시 아주 조금이지만 미약하게 담아냈다. 그런 그의 밑에서 이불을 꽉 쥐고 다물지 못한 입술 사이로 뱉어지는 소리에도 나는 행..
“사귀시던 애인분이 계시죠? 애인분 연락처 뒷번호가 0000 맞으신가요?” “네? 아, 네. 그런데요. 누구세요?” “그 애인분께서 ‘나에게 당신은 너무 과분한 사람이야. 그러니 여기까지만 하자. 미안해.’라는 말씀을 남기시면서, 이별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까 봐 직접적으로 이별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이별을 전해주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이별을 받아들인다. 금방처럼 이별을 전했을 때, 그저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 아무것도 담지 않은 멍한 눈빛으로 그저 나를 바라보는 사람, 눈에 불꽃을 일으키며 상대방에게 전화하여 쌍욕을 시전하는 사람, 심지어 나에게 손찌검을 하는 사람까지. 수많은 각기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아, 물론 손찌검..
드디어 오늘. 성년의 날이 되었다. 오늘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녀에게 고백할 날만을. 저보다 한 학년 선배인 그녀와 썸 타는 기간 동안 줄곧 고백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애타고, 고백만을 기다려왔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성년의 날을 맞이하여 그녀에게 고백하려고 한다. 그녀에게 고백과 함께 몇 날 며칠을 고심하여 고른 향수와 장미꽃까지. 장미는 오늘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근처 꽃집에 들를 예정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전신거울을 바라보니 한껏 멋을 부린 내가 웃으며 마주 보고 있다. 드디어 오늘이다. 뽜이팅. 윤두준. 이 근처 어디선가 꽃집이 있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꽃을 사려고 하니 꽃집이 눈에 띄지 않는다. 평소에 도통 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런..